법원이나 수사기관에 가는 일은 대부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문제는 그 공간이 말을 잘 듣고, 빠르게 이해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질문은 빠르고, 설명은 짧으며, 모든 절차는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흘러간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각에 불편함이 있거나, 고령이거나, 긴장과 공포로 인해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인가 보다.”
모든 사람이 그 상황을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지 않거나, 설명이 빠르게 지나가거나,
낯선 공간에서 질문을 마주하면 말의 의미보다 분위기만 남는 순간이 생긴다.
그럴 때 사람들은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괜히 번거롭게 하면 안 되겠지”,
“이 정도는 참아야겠지”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알기도 전에,
절차는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다.
이것은 불편이 아니라 ‘권리’의 문제다
말이 잘 닿지 않는 상황에서도 절차가 그대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권리의 문제가 된다.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질문에 답하고,
충분한 설명 없이 결정에 동의하게 되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선택할 기회 자체를 갖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사법 절차에서의 권리는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을 듣고,
자신의 상황에 맞는 도움을 받으며
절차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그 권리는 성실함이나 인내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정예규가 명시한 권리의 범위
이제부터는, 이 권리가 실제로 어떻게 보장되도록 설계되어 있는지
행정예규 내용을 기준으로 정리해본다.
이러한 권리를 실제로 보장하기 위해
법무부는 작년 10월 행정예규를 통해
사법 절차 전반에서 제공되어야 할 지원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이 예규의 핵심은
단순한 편의 제공이 아니라,
사람이 절차를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행정예규에 따르면,
사법 절차에 참여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진다.
- 의사소통을 보조받을 권리
- 정보를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제공받을 권리
- 절차 진행 과정에서 필요한 지원을 요청할 권리
이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만 허용되는 예외가 아니라,
절차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특히 이 예규는
청각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
고령으로 인해 설명 이해가 어려운 경우,
또는 심리적 긴장으로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힘든 상황에서도
절차가 일방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알아듣지 못했지만 넘어간 상황’은
제도적으로 이미 보완되어야 할 영역으로 규정된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지원이 당사자의 성실함이나 인내에 맡겨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행정예규는
지원이 필요한 상황을 인지했을 때
기관이 이를 안내하고 조정할 책임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법원에서 실제로 제공되는 주요 지원 유형
법원은 절차에 참여하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진행되지 않도록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특정한 배려가 아니라,
절차의 공정성과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본적인 지원 체계에 해당한다.
- 의사소통 지원
수어통역, 문자통역, 보청기·확대경과 같은 보조기기 제공,
음성·점자 변환 파일 제공 등 - 이동 및 접근성 지원
휠체어 등 이동 보조기구 제공,
청사 내부 이동 편의 지원 - 보조인력 지원
의사소통이나 이동 과정에서
당사자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 인력 지원 - 절차 중 휴식 보장
조사·재판 중 집중 유지가 어려울 경우
진행 속도 조절 및 휴식 제공 - 법률 상담 및 대리 지원
경제적 사정으로 법률 조력이 어려운 경우
대한법률구조공단 등을 통한 무료 상담·대리 - 정보 접근성 지원
판결문 등 법률 정보를
전자 파일·음성 파일 등으로 제공
아래 이미지는 법원에서 안내하고 있는 사법지원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실제 제공 방식과 범위는 사건 및 기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사항은 담당 재판부 또는 민원실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지원을 어떻게 요청할 수 있는가 (초간단 체크리스트)
아래 항목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법원이나 수사기관에 지원 요청을 고려할 수 있다.
1. 이런 상황이라면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 □ 설명이 빠르거나 어려워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다
- □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답하게 된다
- □ 청각·시각·인지·언어 이해에 불편이 있다
- □ 긴장·불안·건강 상태로 집중 유지가 어렵다
※ 장애 등록 여부와 무관하게,
절차 참여에 어려움이 있다면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2. 언제 요청할 수 있는가
- □ 재판 전·중·후 모두 가능
- □ 조사 시작 전 또는 진행 중 가능
- □ 이미 일정이 잡힌 이후에도 요청 가능
3. 어떻게 요청하면 되는가
- □ 담당 재판부 또는 조사 담당자에게 구두 요청
- □ 법원 민원실 또는 사법접근 관련 창구를 통해 요청
- □ “의사소통 지원이 필요합니다”라고 간단히 전달
정확한 제도명이나 법 조항을 말할 필요는 없다.
4. 이렇게 말해도 된다 (예시)
-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워 지원을 받고 싶습니다.”
- “절차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채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요청 사유가 된다.
마무리하며
이 글은 새로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쓰인 글이 아니다.
이미 제도 안에 존재하는 권리가
현실에서 작동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전달되지 않으면 권리는 작동하지 않는다.